<우리동네, 그리고 산책>
부산의 근대문화유산을 찾아서
적산가옥(敵産家屋). 광복 후 일본인이 물러가며 남겨 놓고 간 주택을 일컫는 말이다. 적산가옥은 당시 일본인의 안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광복동, 동광동, 부평동, 신창동, 대교동, 충무동, 보수동에 1만 4000호에 이를 정도로 많았지만, 세월이 지나며 거의 사라졌다. 왜 여기에 관심을 갖느냐! 일제 강점을 입증하는 네거티브 헤리티지(부정적 유산)로 건축과 역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는 동구의 적산가옥을 포함한 근대문화유산을 찾아 산책.
일본식 목조주택, 정란각. 현 “문화공감 수정”
주택가 담장 너머로 일본식 건물이 언뜻 보인다. 1936년 일본인 철도청장의 사택으로 지어진 정란각은 일식 근대가옥으로 목재는 물론이고 유리까지 대부분의 건자재를 일본에서 실어왔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정란각이라는 유명한 요정으로 사용되다가 2007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 현재는 “문화공감 수정”이라는 이름의 문화 사랑방으로 재탄생했다.
현재 1층은 찻집으로, 2층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는데 1층의 찻집은 동구노인종합복지관이 공동 운영을 맡아 어르신들께서 다양한 차와 커피를 판매하고 있다. 보통 전통찻집에서 파는 전통차들은 기본 가격대가 높은 편인데, 이곳의 음료들은 전메뉴 균일가 4,000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만 운영한다고 하니 참고하시길. 단순한 찻집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을 채용해서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주민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가는 곳이다.
일본냄새 물씬나는 건물과 주위를 둘러싼 일본 특유의 작은 정원에 한번 감탄을 하고 건물 안의 다다미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지금 일본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당시 가옥에서 사용하던 기모노를 넣던 서랍장 등 물품들도 일부 재현되어 있어 더욱 생생하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들게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이색적인 사진을 찍기도 좋을 것 같다. 그 시절 부산의 모습 중 일부라 생각하니 왠지 역사 속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도시 환경이 바뀌면서 이곳 정원부지의 일부가 부동산개발업체에 팔려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나머지도 매각될 위기에 놓이는 등 훼손이 될 뻔 했지만, 일제의 압정과 수탈의 역사를 잊지 않기위한 노력들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우리 주변의 많은 문화유산들도 이렇게 사라지기도 사라질뻔하기도 하는 모습들을 보자니 안타깝기만 하다.
맛깔나는 음식과 정원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달마 갤러리
부산의 근대문화역사와 건물이 담긴 또 한 곳인 초량의 달마 갤러리. 비탈진 입구를 지나 잘 가꾸어진 정원으로 들어서면 다양한 볼거리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지금은 보기 어려워진 우물에다가 작은 연못까지 있다. 옛날 모습을 많이 잃기는 했지만 이곳 역시 일본식 양식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초대 부산시장이자 4대 경상남도지시가 관사로 사용했고, 6.25 때 부산이 임시수도로 있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는 민간에서 매각을 하여 스님께서 관리를 하고 계신단다.
건물 이름에 걸맞게 곳곳에 달마상, 액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면 집안에는 빈티지함을 뽐내는 옛 가구들, 고풍스러운 도자기 작품과 달마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가 그득하다. 그럼에도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작품들이 관리하는 사람의 성품을 보여주는 듯 하다.
여기에서도 전통차를 판매하는데, 대표메뉴는 사찰식 산채비빔밥이다. 주로 동구 이바구길 투어를 하면서 점심코스로 많이 이용한다고 하는데, 그 정갈함에 매료될 수 밖에 없겠다. 밥을 다 먹은 후 내어오는 차 또한 향이 일품이다. 옥상에 올라가면 부산항 일대가 전부 내려다 보인다고 하니 이런 신선놀음이 또 어디있겠는가.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비욘드 가라지(beyond Garage)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 맞은편, 바다와 가까운 이곳엔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빨간 벽돌 건물이 있다. 약 60-70년 전, ‘대교창고’라는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엔 쌀 창고, 해방 후엔 제지 창고였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폐창고로 전락하고 말았던 곳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2013년 청년들에 의해 대교창고는 ‘비욘드 가라지(beyond Garage)'라는 부산 복합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비욘드 가라지는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의 내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높은 벽과 천장, 넓은 내부, 철제 계단으로 이루어진 복층 구조 등이 이곳이 창고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과거 이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벽과 기둥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이곳만의 매력이다.
현재는 콘서트 무대로 이용되기도 하고, 뮤직비디오․광고 등 각종 영상 촬영지로, 셀프웨딩장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넓고 비어있다는 점에서 창고는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정기적인 플리마켓이 열리는 장소로 유명하다.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로 생각했던 창고가 활기 넘치고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재개발보다 재발견을 해 낸 이 곳. 한번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때 방문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