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그리고 산책>
화려한 여름의 도시 해운대에서 오래된 소박함을 찾아가는, 산책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게다가 습도까지 높다. 이럴 때는 차라리 땀을 흘려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바깥으로 나가본다. 전국에서 몰려들어도 부산 사람들은 절대 안가는 해운대로 가보았다. 당연히 자동차는 집에서 좀 쉬게 한다. 남들 노는 것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있었지만, 남들이 잘 모르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해운대의 작은 쉼터, 소나무 공방
부산 해운대역 1번 출구로 나와 고층빌딩 '스펀지'의 뒷골목에 자리한 해운대 솔밭예술마을.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조그만 공원 같은 소나무 숲에 5~10평 크기의 아기자기한 공방 6곳과 1개의 갤러리가 나란히 눈에 들어온다. 공방들이 투명한 컨테이너박스로 이루어져 있어서, 안에 있는 그림, 그릇 등의 작품들이 슬쩍슬쩍 보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옛날 이 곳에 거북이가 많이 살아서 ‘구남로’라는 지명이 붙었다는데, 그래서인지 곳곳에 거북이 형상 조형물이 자주 보인다.
부산에서 토지가격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인 해운대구 우동에 이런 문화 마을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솔밭문화마을은 낡은 슬레이트집이 몰려있는 대표적인 슬럼가로, 일제강점기 때 해운대역에서 일하던 철도노동자들이 울창한 소나무 사이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200~300년 된 소나무 20여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소나무는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뻗어 있거나 보일러실을 통과하는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소나무 숲은 수년 전 인근에 아파트 신축 허가가 난 후로 한때 사라질 처지에 놓이기도 했고 한다. 당시 해운대구와 주민들이 이곳의 소나무를 지키고 예술가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공방촌을 만들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예술인 상설 작품전이 열리고, 각 공방마다 염색, 인형 만들기, 가죽, 도자, 업사이클링 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으니 무더운 낮 시간을 공방에서 보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듯. 단, 일부 프로그램은 사전 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에 유의. 만일 솔밭예술마을에 가볼 계획이라면 너무 기대하지는 말자. 알찬 내용보다 작은 규모에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대도시보다도 화려한 한여름의 해운대에서 쉼표 같은 곳이 아닐까.
모래사장 위의 북카페
공방에서 실컷 뭔가를 만들어냈다면 이번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나가보자. 파라솔과 사람들에 가려서 모래나 바닷물이 당최 보이지도 않는다. 일광욕을 즐기지 않는 1인은 이 땡볕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여기도 여유를 발견했다.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사장 중간에 떡하니 자리 잡은 컨테이너박스 하나. 통유리에, 길이 12m, 폭 6m, 2층 뻥 뚫린 옥상 테라스에 선 베드까지 완비된 ‘책 읽는 바다카페’다.
해운대구와 사회적 기업인 (주)유즈드북에서 운영하는 이 이색 카페는 누구나 자유롭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책 읽는 바다카페’에 있는 책들은 (주)유즈드북에서 공공도서관 등에서 기부 받은 헌책을 수거하여 선별, 분류작업을 거쳐 제본 및 소독을 통해 재활용 가능한 책으로 재탄생된 책들로 전시용이 아니라 정말 볼만한 책들이 꽤 있다.
해변가의 카페에 들어가 바다뷰를 위해 치열한 창가자리 선점 전쟁을 벌일 필요도 없다. 이 카페는 사방이 모래사장에, 바다가 보이니까. 게다가 에어컨도 빵빵해서 더운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휴식처가 될 수 있을 듯하다.
해운대에도 온천이?
뜨거운 태양에 지친 몸을 온천에서 풀어본다. 여름에 무슨 온천이냐고?이열치열이란 말이 있다. 게다가 해운대 온천이 동래온천과 더불어 부산 온천계의 쌍두마차라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신라시대 진성 여왕도 다녀갔다는 해운대 온천이 근대식으로 개발을 시작한 것은 일본강점기 때부터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 부산사람이 몇이나 될까? 옛 것을 보존해서 자원화하지 못하고 자꾸만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작금이 조금은 아쉽다.
해운대 구청 안에 있는 연못은 1935년에 해운대온천합자회사 대온천 풀이 들어선 곳이란다. 해운대 구청을 나서면 since 1939, 1935라고 적혀있는 즐비한 온천들과 1964년 문을 연 음식점이 옛날과 지금의 세월 모두를 간직한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온천이 부담스럽다면 해운대 구청 안에 있는 족욕장을 이용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신도시적인 이미지와 화려하기만 한 줄 알았던 해운대의 치명적인 매력이 여기에 있었다.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미포 철길
이렇게나 시간을 보냈는데도 해가 긴 여름이라 아직 환하다. 해질녘쯤이 돼서야 고급 호텔들이 즐비한 해운대 백사장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미포에 다다른다. 차를 타고 오면 빙 둘러 와야 하는 길인데, 바다를 따라 걷다보니 금방이다.
미포는 동해 남부산 철길의 해운대와 송정 간 철길 건널목이 있는 작은 포구 마을이었다. 1934년 개통한 동해남부선 철도(부산~경주)는 좌동~송정역을 연결해 만든 우리나라 유일의 임해철도선이기도 하다. 이제는 폐선이 되어 기차가 다니지 않는 미포~옛 송정역 구간 4.8km의 시작점인 미포 건널목. 철길은 해운대 미포건널목에서 옛 송정역까지 이어져 있으며, 길 중간에선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등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 이 길은 난개발로 그 정취를 잃을 뻔 했다. 미포 앞바다를 매립해서 도로 등의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관광시설을 유치하려고 했던 것. 많은 사람들이 미포를 부산 해안의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들이 모여 많은 사람들을 실은 기차가 매일 분주히 오고갔을 기찻길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철도가 뜯겨나가고, 작은 항구가 육지가 되어 크고 작은 숙박시설들로 가득해졌다면. 그래서 철길에서 양팔을 들고 균형을 잡으며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여대생들, 형광색 등산복을 깔 맞춰 걷는 중년부부의 뒷모습, 녹물이 같이 들어가는 돌멩이를 같이 밟아 가며 쉬엄쉬엄 추억을 쌓아가는 단란한 가족의 여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을까.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그래도 덥다. 8월에는 여행도 좋지만, 가까운 우리 동네 산책. 어떠하신지.